3) 경전의 번역 실론의 불교와 같이 인도에서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인 나라도 있지만, 중국의 불교와 같이 자기말로 번역하여 받아들인 민족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중국의 언어로 번역된 한역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오늘에 이르렀거니와, 중국의 언어로 번역된 과정은 너무나도 어려운 과정이었다. 인도와 중국과는 언어학적 거리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불교가 이 두 민족을 접근시킬때까지 양자간에는 정치적,문화적인 교섭이 전무한 상태였다. 이런 사정 아래서 불교라는 고도의 사상을 표현한 문헌을 한 언어로부터 다른 언어로 옮겨놓는다는 사
경전해설 1) 경율론(경율론) 삼장(삼장)경(經)의 첫머리에는 「불설 〇〇경 (佛說 〇〇經) 」이라고 기록되어 있거니와, 부처인 석가의 가르침을 설한 것이 경전이다. 그중에는 붓다가 스스로 설한 것과 제자의 청탁으로 설한 것이 있다.이 경은 「8만4천 법문(法門」 이라든가 「 8만4천12부(部) 가르침」이라는 것처럼 방대한 수에 이르고 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 그 제자들에게 구수(口授)된 석가의 가르침이 결집되어 차츰 인도의 속어(팔리어, 산스크리트)로 기록되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 볼 수 있는 팔리어의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
22) 종파를 초월한 계문(戒文)불교도가 한자리에 모였을 때 함께 있는 외는 계문(戒文)에 삼귀의문(三歸依文)이 있다. 법회에나 식전에서 의식을 집행하는 스님인 도사가 선창하거나 전체 대중들이 함께 외며 예배를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귀의불이욕존(歸依佛離欲尊). 귀의승중중존(歸依僧衆中尊)이라고 하는데 그 본문은 다음과 같다. 일체공경(一切恭敬) 자귀의불(自歸依佛)당원중생(當願衆生) 체해대도(體解大道) 발무상의(發無上意)자귀의법(自歸依法) 당원중생(當願衆生) 심입경장(深入經藏) 일체무애(一切無碍)풀
20) 삼법인(三法印)의 교리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사실(事實)을 삼법인(三法印)이라는 세가지 기본 입장으로서 포착하고 있다. 즉 제행무상(諸行無常 - 만들어진 것은 모두 변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 -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혼자가 아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 – 아집을 떨쳐버리는 곳에 평온이 있다)이다.이런 입장에서 생활하면 틀림없이 행복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줄 알고있으면서도 좀처럼 깨달아 실천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 범부(凡夫)들이다. 첫째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성자필쇠(盛者必衰)나 회자정리(會者定離)의 비유가 있는
19) 육바라밀 (六波羅蜜)피안(彼岸)에 이르는 길 : 바라밀(波羅蜜)이란 산스크리트어의 를 음역한 것이다. 이것은 파라마(最高)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이다. 안전 또는 완성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을 지혜의 완성 따위로 옮긴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에 들어갔을 때 을 라는 뜻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를 파라므(彼岸)라는 말과 이다(갔다)라는 말과의 합성어로 본 것이다.깨달음의 피안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을 바라밀(波羅蜜)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이 해석은 용수(龍樹)가 저술한 대지도론(大智度論)과 그 밖에도 이미 인도(印度)에서 행해진 해
18) 보살(菩薩)에의 접근대승불교도의 이상상으로서 보살은 팔리어(Bodhisatta)가 그 원어이며, 한자로 보리살타(菩提薩埵)로 옮긴 것을 다시 줄인 것이다. 이 단어는 초기경전 아함(阿含)에도 나타난다.「내 정각 이전, 아직 정각(正覺)을 이루지 않은 보살이었을 때.....」여기서는 단순히 수행자로서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으나, 대승불교도 들엥 의하여 그것을 새로룬 불교인의 이상으로서 발전시켰다. 보살은 상구보리 하화중생 (上求菩提 下化衆生), 즉 자기의 정각을 추구하느 자리행과 살아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이타행을
17) 소승불교(小乘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불교를 크게 둘로 나누어 소승불교(小乘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부르고 있다.분파의 시작 불교경전은 부처님의 입멸 직후 제자들에 의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아 외우고 이를 확인한 이른바 ‘제1결집’을 마쳤다. 라자가하(王舍城)에서 열린 이최초의 결집(結集)에는 5백명의 상좌(上座) 비구가 참석했는데 부처님이 가르치신 것을 하나 하나 외우고 그 자리에 모인 스님들이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함께 외웠다. 때문에 이를 합송(合訟)이라고도 한다. 이로부터 1백여년간 불교교단은 수행과 전법(傳
16) 누구를 위한 수행인가?종교의 일반적인 사회기능(社會機能)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사회와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크게는 전체 인류)에게 행복에의 소망을 갖게하고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 사회를 순화(醇化)하며 제도(制度)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불교는 어떠한 입장인가?불교 역시 이에 다를바 없다. 그렇다. 불교 자체의 역사속에서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켜온 것이 있었으니, 출가(出嫁)자의 수행이 뭣을 위하고 누구를 위한 것이냐에 있었다. 일반 신도들의 신앙. 수행도 논쟁 밖에 따로 설수는 없다.흔히 대승불교에서 소승불교에 대하여
15) 자비(慈悲)의 원리부처님이 말씀한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을 해치지 않는 불해(不害)와 자비(慈悲)다.불해(不害)는 불살생과 같은 말로서, 나에게 있어서 자기가 더없이 사랑스럽듯이, 남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그 자기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이 사실의 인식을 밑받침으로 불해(不害) . 불살행(不殺生)의 윤리가 제시된 것이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소원이 있다.풍족한 생활,명예, 평화의 기원 등 끝이 없다. 그러나 어느 소원을 가지고도 내 생명과 바꿀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산다는것잉 인간의 기본적인 소원이며, 죽고
14) 업(業)의 법칙과 인간운명업(業)은 산스크리트어로 까르마(Karma)라고 하며 행위(行爲)라는 뜻이다.만들어진 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 행위의 특색이지만 행위는 사라져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행위는 뒤에 보이지 않는 힘을 남긴다. 사람을 죽일 때 죽인다는 행위는 죽이고 나면 사라져버리지만 그것으로 살인의 행위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 보이지 않는 힘이 곧 업(業)이다. 이 뜻의 은 두가지로 나누어진다.첫째의 업은 인(因)과 같은 성질로서 선의 행위가 선의 결과를 남기고, 악의 행위가 악의 결과를 남기는 경우다. 선의
13) 생존(生存)의 열두가지 중요한 것(十二緣起說)현실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생존과 깨달음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 십이연기(十二緣起)이다. 십이연기란 우리들의 생존에 있어서의 중요한 것은 열두가지로 끄집어내어 그 의존관계, 조건관계를 더듬어서 미혹(迷惑)한 생존의 근원을 밝힌 것이다. 이 열두가지의 관계를 더듬어 현실의 미혹의 근원을 탐구하고 어떻게 하면 미혹의 근원을 끊어버릴 수 있는가를 추구해서 생존의 중요한 것을 찾아낸 것이다. 열두가지란 것은 노사(老死). 생(生). 유(有). 취(取). 애(愛). 수(受)
12) 바르다는 것은 중도(中道)이다.「팔정도」 로서 바른 생활이 실현되면 그것은 가장 행복한 세계, 바로 열반이다. 그럼 도대체 바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이 실천의 원칙을 어떻게 말씀해 주셨는가 「비구들이여, 출가한 사람은 두가지 극단에 친근해서는 안된다. 그 두가지란 무엇인가? 온갖 욕망에 오로지 집착하는 것은 비열하다. 범부의 소행이어서 성스럽지 못하며, 또 무익하다. 그리고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은 다만 괴로울 뿐, 성스럽지 못하며 또 무익하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두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11) 성(聖)스러운 팔지(八支)의 도(道)불행의 원인인 무지와 그릇된 생활태도를 떨어버리도 행복(열반)에 이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여덟가지 바른길(八正道)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를 하나씩 살펴보자. 바르게 봄- 정견(正見) : 첫째의 이 정견(正見)은 바른 견해 바른 인생관을 말한다. 불교로써 말하자면 연기(緣起)의 입장에서 세계를 이해하여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과 사물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확립되어야 한다. 견해가 바르지 못할 때 그릇된 삶이 나타나며 그 결과 불행이 온다. 바른 인생관
9) 열반(涅槃)에 이르는 길「성스러운 수행을 하는 것은, 열반에 들고 열반에 가기 위함이니...」이 열반은 팔리어로 「닙바나」(nibbana), 산스크리트어로는 「 니르바나」(nirvana)로서 중국 역경자들은 이것을 음사하여 「열반」이라 했고, 이것을 의역하여 멸도(滅道)니 적멸(寂滅)이니 혹은 더 간략하게 멸(滅)이라 하기도 했지만, 이무래도 원뜻이 잘 나타나지 않아서 「열반」이란 음사가 가장 많이 쓰이어 온 것이다. 굳이 원뜻을 찾는다면 「불이 꺼진 상태」 즉 「연소의 소멸」을 가리킨 말이다. 부처님의 제자 사리풋타가 외도와
5) 무상(無常)의 원리붓다가 존재론으로써 연기를 설명하면서 또 하나 잘 사용한 용어가 무상(無常)이다.이는 말할 것도 없이 ,영구적인 것, 불변하는 것과 상반되는 말이다.한때 우리나라 TV 연속극대사에 ‘삶의 회의, 인생무상’이라는 말을 연거푸 사용하여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는 꼬마들의 입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디 뱉어내기도 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이 무상(無常)이라는 용어는 말할 것도 없이 불교에서 배웠던 것이며,또 그런 사고방식을 불교로부터 받았음이 명백하거니와, 원래 이 무상이란 ‘헛됨’ 이나 ‘실망’과 같은 정서적인 내용의
불교사상의 본질1) 불교란 무엇인가?불교는 한마디로 부처님께 깨달으신 진리와 그에서 발달하고 분파된 온갖 교리와 법문 및 종지(宗旨)를 통틀어 말하나.‘붓다’ 곧 부처님이란 ‘깨달은 이’라는 뜻으로서 불타(佛陀) 또는 불(佛)이라고 약칭하며, 이 말은 처음에는 보리수 아래서 성도한 석가모니(석가모니 .Sakyamuni)에 대한 칭호로써 쓰였으나 뒤에 불교 교리의 발달에 따라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일컫게도 되었다. 불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해 하는, 가장 기본적인 성격은, 인간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있다고 한다. 다른 종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