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동국대학 재학시절, 제 1 집필기

 

< 젊은 포교법사로 인기끌어 >

일붕 큰스님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거하게 된 곳은 바로 종로구 창신동 소재의 안양암이었다.

이곳 포교법사로 부임하셨기 때문이다. 안양암은 50년 전통의 포교사찰로 과거에 내노라하는 무수한 법사님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일붕 큰스님이 포교법사로 부임하자 젊은 법사가 왔다고 여신도들간에 인기가 대단했다.

일붕 서경보 큰스님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며 웃으신다.

“ 전에는 포교법사가 대개 50~60대의 노법사였거든요. 겨우 30대 초반의 내가 법사로 부임하자 신도들이 날마다 늘어났지요. 나이 많으신 여신도님들이 짓궂은 말장난을 해오셨어요. 젊고 예쁜 비구니스님이 있으면 남신도들이 짓궂은 말을 걸어보는 그런거였지요.”

 

한편, 해방과 동시에 혜화전문학교를 모체로 하여 불교종단읭 학교로 동국대학교가 생기자 스님은 동국대학 불교학과에 편입하게 된다. 이미 일본에서 대학과정을 마쳤으므로 일붕 큰스님은 의당대학원으로 들어가야 했으나 당시는 대학원이 아직 생기지 않았고, 당시 동국대학에는 전상노, 김포광, 김영식,김동화 교수 등 쟁쟁한 학승들이 계셨으므로 더 배우자는 생각에서 동국대학에 입학하시게 되었다고 한다.

 

< 안양암의 노스님 >

그러나 안양암의 포교법사로 일을 보면서 틈틈이 학교에 다녀야 했고, 특히 당시 안양암의 주지스님이 이태준이라는 93세의 노스님이셨으므로 늙으신 노스님을 대신하여 사찰도 운ㅇ여해양 했었기에 포교일에 , 학교공부에 하루도 쉴새없이 4년 동안 일과 공부에 전념하여 1950년 6.25가 나던 해에 졸업을 하게 되셨다고 한다.

 

일붕 큰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 안양암의 이태준 노스님은 현대 한국불교사상 희유한 대덕이신데 손가락 하나는 부처님 앞에 태워 연지공양으로 바치셨고, 다른 손가락 하나는 아버님께 태워 올려 열 손가락 중 여덟 개의 손가락밖에 없으셨다고 한다.

 

이 안양암 시절은 큰스님에게 상당히 뜻깊은 시절이기도 하다.

일붕 큰스님께서 이곳 안양암의 포교스님으로 계실 때 문서포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포교의 방편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때 써서 펴낸 책으로는 <불교입문>, <불교학 개설>, <석가여래와 그 제자들>, <한국불교역사>등으로 당시 학계에서 아직 배우는 대학생의 신분으로 유수한 글을 썼다하여 주목을 받기도 했으며, 바로 이때부터 일붕 큰스님의 문서포교는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오늘날 일붕 큰스님께서 문서포교의 수단으로 펴낸 책자는 자그마치 5백여권의 기록적인 숫자에 이르는데 그 기원이 바로 이 안양암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기술인은 일붕 큰스님의 5백여권의 책자 발행에 대하여 독자들의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하여 간단히 덧붙여 설명코자 한다. 큰스님이 편찬한 책자중에는 대학교재도 수십권이지만 아동들의 이해를 돕거나 혹은 글이 짧은 여신도들을 위하여, 혹은 불교에의 초입문자를 위하여 그때그때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기회있을 때 마다 펴냈으므로 몇 10페이지 정도의 소책자도 있고,50여 페이지의 선시집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각자의 생각대로 3백여 페이지의 책만을 생각하고 일붕 큰스님께서 펴낸 5백여 권이라는 숫자를 부정하려거나 의심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임을 이 자리를 빌어 일러둔다.

 

< 독학으로 영어공부 >

끝으로 이 안양암 포교법사 시절은 일붕 큰스님께서 독학으로 영어를 깨치신 시기이기도 한다

일붕 큰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에 유학해 보니 당시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고, 일본이 미국에게 패망했음에도 식자들간에 영어열이 대단히 높고, 일상용어에도 영어를 의외로 많이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의 현대화가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크게 힘을 입었고, 영어는 미국어가 아닌 영국말이며 국제어라는 인식 때문인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러면 혼자 영어를 독학하던 시절의 회상담을 들어보기로 하자.

“일본어는 식민지시절이라 일상어로도 쓰고 있었고, 어법이 우리와 같고 한문을 깊이 알고 있었기에 어려운줄을 몰랐는데 영어는 예상외로 어렵더군요. 어법도 다르고, 제대로 영어를 구사할만한 분이 많지가 않아 모르는 것을 물어볼 길도 없었고...... 발음이 제대로 되었는지 어디에 테스트할 수도 없던 시절이라 무조건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외우는 식으로 익혔지요.

한국승려들도 앞으로 해외에 나가게 되고 각종 회의에도 참석하게 될 것인데 국제어를 모르면서 말의 구술을 갖췄다 하더라도 그것을 꿰지 않은것과 같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다른 스님들은 영어까지 배울 필요가 없다면서 영어를 경시했지만 나는 앞으로 국제사회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을 믿었으므로 열심히 공부했어요. 내가 불교대표로 해외로 나갈 수 있었던 것도, 해외 대학의 교환교수로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다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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