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해설

 

1) 경율론(경율론) 삼장(삼장)

경(經)의 첫머리에는 「불설 〇〇경 (佛說 〇〇經) 」이라고 기록되어 있거니와, 부처인 석가의 가르침을 설한 것이 경전이다.

 

그중에는 붓다가 스스로 설한 것과 제자의 청탁으로 설한 것이 있다.

이 경은 「8만4천 법문(法門」 이라든가 「 8만4천12부(部) 가르침」이라는 것처럼 방대한 수에 이르고 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 그 제자들에게 구수(口授)된 석가의 가르침이 결집되어 차츰 인도의 속어(팔리어, 산스크리트)로 기록되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 볼 수 있는 팔리어의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과 범어(梵語-산스크리트)의 북전대장경(北傳大藏經)의 두가지의 경전이 되었고, 후자는 한문으로 번역되어 우리나라에 전해진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되었다.

 

최근에는 이 두가지 경전이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과연 이들 모든 경이 석가의 직설인가 아닌가, 언제 어디서 만들어 졌는가」라는 근대적인 비판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지역적으로는 인도. 중국. 티베트 등에서 만들어진 경전임에 알게 되었고, 독일의 불교학자 옷트 후란케 박사는 이들 경전의 운문(韻文)의 부분이 오래 되었으며, 산문(散文)은 늦게야 부가(附加)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경전(經典)밖에도 율(律)이라고 해서 불교도로서의 행동규범을 기록한 것과, 논(論)이라고 하여 경과 율에 대한 연구와 해석이 모아진 것이 있으며, 경(經). 율(律), 론(論)의 세가지 서적을 합해서 삼장(三藏 : 트리피타카)라고 부르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는 이 삼장 전체를 석가의 가르침 즉 불전(佛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고려대장경(일명 : 팔만대장경)은 고려 현종 때 글안병을 물리치려고 새겼던 고려초조본 대장경 1,076부 5,048권이 몽고병의 침입으로 불탔고, 1236년 고종 때 몽고병의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다시 시작하여 16년만에 완성된 것이다. 1,511부 6,802권 8만1천2백58판(板)으로 되어 있는 이 고려대장경은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교정이 엄밀한 것으로 유명하다.

 

2) 경전의 결집

경(經)이라는 말은 본디 「실」 또는 「노」를 의미하는 원어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의 역경승들이 「경(經)」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말은 바늗시 불교만에 쓰인 것은 아니며, 널리 일반적으로 짧은 글 또는 금언(金言)을 모은 책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부처님의 제자들도 소승의 가르침의 요점을 간추려 그것을 「숫타 (Sutta)」 즉 경이라고 일컬은 것으로 생각된다.그러기에 초기의 경들은 대개 짧으며, 또 기억하기 쉽도록 운문형식으로 배려되었음을 지적되고 있다. 그러면 초기의 경전은 어떻게 하여 편집되었던가

부처님의 제자 마하.카사파(迦葉)는 부처님의 장례가 끝나자 「교법(敎法)과 계율이 결집되어 비법(非法)이 일어나 정법(正法)이 쇠하지 않도록」 그 가르침을 결집할 것을 다른 비구들에게 제의하였고, 이에따라 여러제자들에 의해 이 일이 착수되었다.

 

여기서 결집(結集)이라고 하는 말의 원어는 samgaha(삼가하), 「모으는 것」 즉 편집의 뜻이거니와 그 일의 내용은 오늘의 편집과는 매우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아직도 그런일에 글자를 사용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 의해 목소리를 같이하여 외고 이를 기억하는 형식으로 실시되었다. 그러기에 결집은 또 합송(合誦)이라고도 일컬어졌다.

 

마하.카사파에 의해 이 일을 위해 선출된 비구는 5백명에 달했다.

라쟈가하(王舍城)의 판니구하에서 마하.카사파가 상좌에 앉아 의장이 되고 오랫동안 부처님의 시중을 들어 왔기 때문에 스승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가르침을 설했었는지 누구보다 잘알고 있던 아난다와, 계율에 관해서는 가장 정통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던 우파리의 두사람을 송출자(誦出者)로 선택하여 진행시켰다.

 

「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라는 양식으로 시작된 것은 이때에 아난다의 송출한 말에 유래한다고 한다. 어쨌던 그렇게 하여 이 두명의 송출자에 의해 부처님의 교법과 계율이 재현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리를 함께한 비구들의 검토를 거쳐 확인되면 그것을 전원이 다시 합송(合誦)했으며, 이런 합송을 통해 그것은 각자의 기억속에 일정한 형태로 간직되어 간 것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편집양식이었다.

 

경전이 결집이 문자로서가 아니라 기억에 의존되었다는 것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불안하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유추에 불과하며 고대인의 정신생활에 있어서의 기억은 상상 이상으로 중대한 구실을 다해 왔다. 우리들이 얼마전 미국의 <뿌리>라는 영화의 속편의 <뿌리-그 다음 세대>를 본 사람들은, 여기에서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부족의 한 노인이 몇백년 동안의 가문별 역사를 구술해 내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 노인의 그 뛰어난 기억력에 힘입어 드디어 그 흑인작가가 자기 조상의 뿌리를 찾게되는 감격스러운 장면은 잊을 수 없거니와, 대를 이어가며 부족별 가문의 역사를 기억으로 전해온 것을 보아서도 기억에 의존한 초기 경전의 성립 과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렇게 하여 편집된 경전은 잘 전승되어 오다가, 이윽고 글자로 옮겨왔다. 그 시기는 정확히 지적하기 어렵거니와, 오늘의 팔리어 경전의 원형을 이루는 것이 기록된 것은 대략 기원전 1세기의 전반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것들을 다시 몇 번인가의 증대(增大)와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오늘까지 이른 것이지만, 그 현존하는 형태는 <팔리五부>에 속하는 상응부경전과 <한역四아함>에 속하는 잡아함경은 가장 원형에 가까운 경전군에 해당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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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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