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월정사 강원 강사시절

 

< 월정사에 강사로 초빙되다>

강원도 월정사로부터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 속히 와달라는 공문과 전보가 왔다.

일붕 큰스님은 위봉사로 달려가 법사되시는 유춘담 스님을 찾아 뵙고 월정사 강사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려드렸더니 춘담스님께서는 무척 반가와 하시고 기쁘게 생각하시며 한국의 일대 대강사가 되라고 격려하여 주셨다.

 

위봉사에서 하루밤을 자고 다시 상경하여 박한영 스님께 인사말씀을 드리고 강릉행 버스를 타고 진부면에서 도착, 월정사 입구에서 하차하였더니 산중의 위덕과 학인들이 마중을 나왔다.

대사는 여러 스님들에 휩싸여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계곡에 큰 냇물이 콸콸 흐르고 푸른 수목이 울창하여 하늘이 보이지 아니할 만큼,과연 심수한 산천이었다.

 

< 월정사의 자랑, 적멸보궁 >

월정사에 들어서니 광활한 기지에 웅장한 법당과 좌우에 크나큰 반사가 있고, 고색창연한 석탑이 월정사의 오랜 역사를 웅변으로 설명하는 것 같았다.

 

개강식을 연 뒤에 일붕 큰스님은 자신이 배운식으로 경전을 강설하고 교수하게 되었다.

이곳 월정사의 명물은 적멸보궁이다. 이 적멸보궁은 통일 신라시대에 지장율사가 중국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정골을 땅속에 깊이 묻고 그 위에 지은 전당으로, 부처님의 정골이 묻혀 있기 때문에 불상을 별도로 모시지 않고 탁자만 만들어 놓았다.

 

이 월정사 주위에 위치한 상원암(上院庵)이란 암자는 동국 제일의 선원으로 당대의 고승이요명승이신 방한암(方漢岩)스님이 1백여 승려를 지도하고 계셨다.

방한암 스님의 면모에 대하여 일붕 서경보 큰스님은 다음과 같이 기억하시고 계셨다.

 

< 방한암 스님의 가르침 >

“방한암 스님은 백발노인에 잡기가 벗어진 선풍도골이셨어요. 말하자면 계율과 선정. 해학을 겸전하고 계신 전형적인 도인스님이셨어요. 천성이 자비스러워 누구에게나 합장으로 부드럽게 대하고 심지어 아동들에게까지 반드시 경어를 쓰셨어요”

 

일붕 큰스님이 처음으로 상원암 선방으로 방한암 스님을 찾아가서 스님께 월정사에 새로 온 강사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깍듯이 맞아주시며 이렇게 격려해주셨다고 한다.

 

“젊은 연기에 벌써 경학을 마치고 강사가 되었으니 아무쪼록 학인들을 잘 가르치고 더욱 수도하여 불법에 큰 기둥이 되고 들보가 되시오”

“스님, 참선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습니까?”

“일대시교를 마친 이가 그것을 몰라서 물으십니까? 천경만론이 오직 마음을 밝히라고 가르쳤고,역대조사가 온갖 방법을 다 하였으미 그대로만 믿고 간절하게만 공부하시면 되는 것이지요. 선(禪)과 교(敎)가 본래 하나요, 둘이 아닙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방일하지 않고 굳은 신심으로 간절하게 참구만 하면 그대로가 참선이니까 별다르게 구하지 말고 단지 이 몸이무엇인고 하고 의심만 하시오.”

 

< 뒤늦게 들은 어머님의 부음>

이곳 월정사는 일붕 큰스님께서 처음으로 불교를 남에게 가라친 곳이고, 어머님의 부음을 들을 곳도 이곳이다. 제주도를 떠난 후, 집에 한번도 소식을 전하지 못하셨던 점을 크게 후회했다. 어머님의 병환이 중하자 집에서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부고를 보냈으나 어떻게 연이 닿지 않아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설마 어머님이 그간 작고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간 집나간 아들이 궁금하여 보낸 며느님 즉 경보 큰스님의 이씨 부인이 그곳 월정사까지 찾아와 어머님의 부음을 전함으로써 어머님이 이승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제주도에서 출발할때만 하여도 강보에 싸였던 아들을 처음 보게 되었다고 한다. 부인 이씨가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데리고 왔던 것이다. 아니 어린 아이를 스님께 보여줌으로써 스님으로 하여금 다시 환속케 하기 위한 뜻도 있었는지는 필경자로서 알 길이 없다.

 

모자가 떠나게 되어 어귀까지 나와 서울행 버스에서 모자를 전송할 때 어린 아드님이,

“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라고 인사를 하여 일붕 큰스님께서 ‘스님, 안녕히 계세요’라고 다시 인사하라고 했더니 “스님,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하면서도 왠지 쑥스러워 하더라고 회상하셨다.

 

서울행 자동차가 뿌연 먼지를 뿜으며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혼자 월정사로 발길을 돌리니 사람의 자식으로 그 어머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죄스러움이 비수처럼 가슴에 파고들었다고 일붕 큰스님은 말씀하셨다.

 

“조금만 더 오래 사셨어도 내가 일본에까지 유학하는 것을 보실 수 있었고, 한사코 집을 나선 나를 용서하시고 이해하실 수 있으셨을 터였는데” 라며 칠순이 넘으신 지금까지 그 죄스러움을 온전히 삭히지 못하셨던지 이 때를 회억하며 큰스님은 눈을 붉히셨다.

 

한 고승으로서의 일붕 큰스님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번민하던 모습을 오직 기술인만이 목격했던 일이고 그 모습을 이 기술인은 먼 훗날까지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그럼 좀 더 큰스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어머님이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인생의 종점이란 이런것인가’하고 생각했지요. 그때 머리에 번뜩 떠오른 구절이 바로 금강경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어요.

일체유위법 (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 (如夢幻泡影)

여로여여전 (如露與如電)

응장여시관 (應裝如是觀)

이라. ‘온갖 현상의 법은 꿈과 환상과 같고 물거품의 그림자와 같고, 또 풀끝의 이슬과 같고 스치는 번개와 같을지니 마땅히 이렇게 보아라’ 라는 뜻이지요...”

 

< 세조대왕과 문수동자 >

다음은 오대산에서 일붕 큰스님이 문수동자를 친견했던 얘기를 옮기겠다.

먼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오대산 문수동자에 얽힌 얘기부터 말하자면 이야기는 이조 건국초기 세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조시대 세조대왕이 재위시에 치적은 훌륭했지만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서인지는 몰라도 몹쓸 피부병에 걸려 무진 고생을 하셨다는 얘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느해인가 세조가 병을 고치려고 상원사 절에 와서 문수보살게 기도를 하다가 몸둥이가 하도 가려워서 견디다 못해 절 밑의 으슥한 개울에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 옷을 벗고 목욕을 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 동자승이 나타나서,

“처사님, 제가 몸을 문질러 씻겨드릴까요?” 했다.

 

인기척에 놀란 세조가 바라보니 티없이 맑은 10세의 동자였으므로 그리하라고 했다. 그 동자승은 물 속으로 들어와 등이며 팔,다리 등을 문질러 주는데 아주 시원하고 기분이 상쾌했다. 뿐만 아니라 신기하게도 온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 세조대왕은 어린 동자승에게, “동자야, 너는 후일에 누구를 보든지 대왕의 더러운 몸을 만졌다고 하지 말라” 라고 했더니, 동자승은, “네,그 약속은 제가 지키겠으니 처사님이야말로 오대산에서 문수동자를 만났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하고 어디론지 사라졌다고 한다.

 

이렇게 신기하게 신병을 치료한 세조는 문수동자에 대한 보은의 뜻으로 조각공들에게 자신이 목격한 문수동자의 모습을 설명해 주고 나무로 이를 새기게 하여 그곳에서 모시게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문수동자상은 지금에는 전하지 않는다.

 

< 일붕 큰스님, 문수동자를 두 번이나 친견 >

그곳 스님들로부터 이와같은 얘기를 전해 들은 일붕 큰스님은 자신이 직접 문수동자를 친견코자 때때로 상원암에 올라가서 지성껏 문수보살 기도를 올리곤 하셨다고 한다.

 

그해 가을 어느 날 일붕 큰스님이 오대산의 유명한 머루,다래를 따려고 깊은 산에 들어갔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게 되었다고 한다. 칡넝쿨,다래넝쿨 등의 넝쿨에 휩싸여 죽을 고생을 하고 있을때에 어디선가 10여세의 동자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 스님이 어쩌자고 이 곳을 들어오셨습니까? 이곳에 들어왔다가 길을 잃으면 누구든지 살아 나갈수가 없습니다.” 하며 손목을 잡아끌고 나가더니 여기가 산길이니 이 길을 따라 나가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스님이 하도 고마워서,

“ 너는 어디로 가느냐?” 고 묻자

“ 나는 상원암이 내 집이니까 상원암으로나 올라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상원암쪽으로 올라갔는데 웬일인지 전혀 올라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또 한번은 어느해 겨울, 일붕 큰스님이 지독한 감기에 걸려 몸에 신열이 올라 20여일 동안 죽을 고생을 하다가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갈 때 혼자 누워있는 병실에 10여세의 사미 동승이 들어와서,

“ 스님, 제가 머리를 만져드릴까요”

하더라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만 몇 번 끄덕였더니 어린 사미동자가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만지자 시원한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잠이 들려는 찰라에 그 사미동자는,

“ 스님, 저는 우리 스님이 부르시어 우리 스님께 갑니다”하고 나갔다.

 

얼마동안을 세상도 모르게 자고 일어났더니 신열도 사라지고 몸도 개운했다.

일붕 큰스님은 자신의 이마를 짚어준 사미동자가 하도 고마워서 다른 스님들께 새로 온 동자같은데 10세 정도의 사미동자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으나 스님마다 요사이 새로 온 사미동자는 하나도 없고 그런 동자를 본 일도 없다고 했다.

 

일붕 큰스님은 그제서야 세조대왕과 얽힌 문수동자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어린 동자가 바로 문수동자임을 깨달았다고 하신다. 이 부분에 대하여 다시 일붕 큰스님의 증언을 여기 옮겨보기로 하자.

“ 모르는 사람은 그것이 다 나의 환영(幻影)이라고 하겠지만 환영이 절대 아닙니다. 오대산에서 나는 분명 두 번에 걸쳐 문수동자를 친견했어요.”

일붕 큰스님의 이런 증언에 대하여 우리와 같은 속인으로서는 반신반의도 할 수 있겠으나

결코 큰스님께서 빈말고 하시지는 않으셨으리라 믿고 싶다,

 

< 일본유학을 권유한 김태흡 법사 >

일붕 큰스님이 오대산 월정사의 강사로 계실때에 월정사에서는 승려수련소라는 것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 승려수련소는 방한암 스님께서 직접 지도하시며 본,말사의 중견 청년 승려들을 대상으로 경학과 포교법 및 사찰운영에 대한 사무체계를 가르쳤다.

 

이 케리큐럼에 불교학과 한국불교사, 포교학의 과목이 들어있었는데 이 방면을 가르킬 마땅한 강사가 없어 부득히 서울의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 전신)에서 강사를 모셨었는데 당시 혜화전문학교의 권상노 교수와 김태흡 교수였다.

 

권상노 교수는 당시 60여세의 노교수로 불교학과 한국불교사를 가르치셨고, 당시 김태흡교수는 ‘포교왕’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한국은 물론 널리 만주,일본에까지 포교사로 불려다녔고, 포교의 일환으로 <불교시보>라는 원간지까지 스스로 간행하셨다고 한다.

 

일붕 큰스님이 일본으로 유학가게 된 것은 바로 이 김태흡 법사의 영향이 컸다고 일붕 큰스님은 말씀하셨다.

“김태흡 법사님이 말씀하시기를 ‘ 스님은 강원출신으로 이미 훌륭한 강사도 되었으니 해외에 나가 불교대학같은 곳에서 다시 불교를 공부해 보라’ 고 말씀하셨거든, 그래서 내가 ‘그런데 가지 않더라도 불교만 더욱 전문적으로 공부하면 그만이 아닙니까’ 하고 말씀드렸더니 김 법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그것도 무방한 말이나 같은 불교라도 해외에 나가서 널리 배우지 아니하면 지시기 고루해져 널리 활용할 수 없는일이니, 일반 사회학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불교 역시 해외에 나가서 견문을 넓혀야 완전한 학문을 이룰 수 있습니다”

라고 외국유학 (일본유학)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런 조언을 듣고보니 전혀 터무니 없는 조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큰스님 자신도 적령기에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 다니기를 염원했으나 완고한 집안 어른들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아쉬움도 있었으므로 학문의 견문을 넓혀야 한다는 가르침은 옳은 것 같았다.

 

통일 신라시대에 혜초가 성지를 찾아 머나먼 성지순례를 찾았던 것이나 의상조사, 의천 등 한국불교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기신 큰스님들이 모두 중국에 유학했던게 사실이었다.

당시를 일붕 큰스님은 이렇게 기억했다.

“ 그때가 일제 말기였어요. 김태흡 법사님의 외국유학도 하고 견문도 넓히라고 했을 때 기왕이면 중국이나 인도로 가고 싶었지만 일제하에 중국이나 인도로 건너간다는 것잉 그렇게 쉬운일만은 아니었거든. 더욱이 가진 것 없는 내가 노자와 학비를 달리 마련할 길도 없었고...

또 김태흡 법사님은 일본에 유학하겠다면 일본엥 갈 수 있도록 자신이 적극적으로 주선해 보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지요. 그리고 우리에게서 불교를 받아간 저들이 불교를 어떻게 융성시켰는가 배우고도 싶었고...

 

< 견문 넓히려 일본유학 결심 >

일본에 가보자고 마음을 고쳐먹은 또 다른 이유는 장차 조국이 해방되고 새로운 시대가 오면 그때는 우리 선불교(禪佛敎)가 세계의 불교계를 이끌어 갈 것이고, 그리하자면 여러나라의 견문을 넓혀야 하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일붕 큰스님은 일어책을 사다가 혼자 독학하기 시작했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서울에서 정양 온 대학생들에게 물어서 일본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럴즈음 ,월정사 주지스님이 일본 경도에 있는 유종묵 씨에게 소개.천거하며 학비 일체를 돌봐주겠다고 하여 1944년, 즉 해방되기 1년 전 스님의 나이 31세에 일본 경도롤 향하게 되었다.

 

“그때 생각지도 않았던 주지스님이 불러 학비를 대주겠으니 일본에 가고 싶거든 가도록 하라고 하신 것은 김태흡 스님께서 장래가 기대되는 재목감이라며 주지스님에게 뒤를 보살펴 주라고 일부러 부탁하고 갔다는 얘기를 들었지요.”

 

우선 서울에 도착해서 대강의 볼일을 보고 행장을 차려 기차편으로 부산까지 내려가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하관에서 내려 기차로 경도로 향했다.

당시 2차대전 말기라서 도시의 곳곳에는 폭격맞은 흔젓이 역력했지만 농촌은 우리에 비해 무척 풍요로워 보였고,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산에 나무가 아름드리도 우거졌던 점이라고 한다

 

경도에 도착해보니 세계적으로 알려진 문화도시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열집 건너 사찰이 있다고 할 정도로 사찰이 많아서인지 전혀 미군의 폭격을 당하지 않은 아름다운 고도(古都)였다고 한다.

 

경도역에 도착하니 유종묵씨가 이미 전보를 받고 출영나와 있었으므로 무사히 그의 숙소로 따라가 이틀동안 휴식을 취한 후, 유종묵씨의 주선으로 바로 임제대학 전문부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대학은 임제종 묘심사 경내에 있었는데 묘심사의 경관은 아주 뛰어났다. 묘심사의 구조는 중국 백장총림의 규모에 준하여 지어졌다고 하며 조실스님의 방이 맨 위쪽에 있었고, 그 다음에 불상을 모신 불전이 자리잡았고, 차례로 설법전이 있으며 좌우로 승당이 있고, 그 앞에 문루가 있어 짜임새가 한국과는 상당히 달랐고 규모도 웅장했다.

일붕 큰스님의 귀국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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