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마음에 행복의 풍금을 치자 》

 세기의 정복자를 꿈꾸던 나폴레옹은 행복을 사치한 생활 속에서 구하는 것은 그림에 태양을 그려 놓고 빛이 비추기를 바라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우리는 저마다 행복을 찾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 행복인지 찾는 사람조차 모르며 그 행복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우리 주변에 행복한 사람도 적은 것 같다.

 

서울의 명동 거리에 가서 진짜 행복한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면 몇 사람이나 손을 들까? 소위 출세 아니 입신양명 했다는 사람들이 모이는 여의도동 1번지 국회의사당에 가서 여러분은 국회의원이 되셨으니 행복하시죠? 정말로 행복한 의원님은 손들어 보라고 하면 과연 얼마나 손을 들 것인가?

 

내가 어릴 적 재미있게 들은 이야기 하나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무지갯빛 영롱한 행복을 꿈꾸던 세 사람이 어느 날 무엇이던지 들어주는 신에게 소원을 말하게 되었다.

 

첫 번째 사람이 저의 소원은 권력을 양손에 쥐고 천군만마를 호령하며 사는 것이라고 했다. 무엇이던지 할 수 있는 신은 그것이 무슨 어려운 일이냐며 들어 주었다.

 

두 번째 사람은 금은보화를 많이 가지고 화장실까지도 금으로 장식하며 호화롭게 살고 싶다고 했다.

이번에도 무슨 어려운 일이냐며 소원을 들어 주었다.

 

마지막 사람이 말했다. 권력도 금은보화도 좋지만 나의 소원은 다르다. 아무 근심걱정 없는 곳에서 그저 편하게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자 무엇이던지 들어 주는 신은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미친놈아 그런 곳이 있으면 내가 살지 너를 줘.” 하면서 호통을 쳐 내쫓았다는 이야기 이다.

 

만인의 소원을 다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신도 근심걱정이 떠날 날이 없다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행복이란 외부에서 구하는 것도 아니며, 누가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며 바로 자기의 생각과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학대사를 돼지처럼 보인다고 이성계가 비하 하자 장군님은 부처님처럼 보인다며 돼지의 눈에는 세상 만물이 돼지처럼 보이고 부처님의 눈에는 세상의 삼라만상이 부처님으로 보인다고 했다는 일화에서도 읽을 수 있듯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다.

 

세상을 가시로 보지 말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으로 보며 힘들게 걷는다고 행각하지 말고 춤춘다고 생각하며 걷는다면 그 발걸음은 날개를 단 것처럼 가벼울 것이다.

 

행복을 밖에서 구하는 것은 지혜를 다른 사람의 머리에서 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행복이란 정신적 희열 상태의 연속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잠시 잠깐의 쾌락에 불과하며 권세나 지위로 얻어진 행복이라면 한 때의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마음속의 일이기에 헛된 세상일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시인 괴테는 “인간 최대의 행복은 인격을 구성함에 있다.”고 말했다. 인격이란 자기 자신이 부단히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적극적인 인격완성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불만족이란 없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으로 참다운 행복을 얻는 데는 스스로의 의지와 고난을 이겨내는 자만이 참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대장간에서 망치질을 많이 맞은 연장이 좋은 연장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돈과 명예나 지위나 권세가 마음처럼 영원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가 영원히 지닐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탐욕은 만족할수록 더 큰 만족을 원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처음부터 만족한 존재였다면 이 세상에는 희망이라는 말조차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며, 그 생활 또한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불행하기 때문에 행복이라는 것을 알고 바라고 원하게 되며, 희망이라는 역동적인 말을 가슴에 담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알랑은 그의 행복론에서 “인간은 행복을 찾기 시작하자마자 행복을 찾을 수 없는 운명에 빠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행복이란 저 쇼윈도 안에 있는 물품처럼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서 돈을 주고 가져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당한 대가없이 얻어진 행복은 아픔만 남긴 채 그렇게 떠나 버린다. 큰 행복일수록 그 자리는 더 크고 아픔은 짙으리라.

 

행복은 날개가 있어서 영원히 잡아두기도 어렵다. 중국의 3대 시성인 두보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봄을 찾기 위해서 산야를 헤매고 다녔지만 봄을 찾을 수 없었다. 피곤하고 지쳐서 언덕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바로 옆에 매화가 활짝 피어 봄을 가져다 놓고 있었다. 이렇듯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주위에 내 마음속에 있다.

 

행복은 행운과는 다르다. 행운은 우연이다. 뜻하지 않은 운이 어쩌다가 내 품에 안기는 것이다. 수고와 노력 없이 얻어지는 운이요 요행이다. 그러나 행복은 내가 창조하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행복을 찾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옳은 지혜와 옳은 사색을 하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인생에 대한 불행이나 파국을 보면 그 내면에는 잘못된 행복 추구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행복은 정신적 만족이다. 정신의 만족은 물질로 얻을 수 없는 것이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가지고 싶은 헛된 탐욕 때문이다. 가난한 자란 많이 가지지 못한 자기 아니라 많이 느끼지 못한 자이다.

 

물질에서 행복을 찾기보다는 마음속에 행복의 풍금을 갖자. 그리고 새들이 노래하는 푸른 초원에서 철따라 행복을 치며 노래를 하자. 눈물처럼 맑은 영혼을 일깨우는 풍금을 치며 나는 행복하다고 노래하자. 사막의 한 가운데라도 폭풍이 치는 언덕 위에 있다고 해도 행복할 것이다.

 

 

나무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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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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