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위봉사 시절

 

< 진진응 스님을 따라 위봉사로 >

경보스님의 세속 나이 21세이던 1935년 가을 전라북도 전주군(지금의 완주군)에 위치한 위봉사(威鳳寺)에서 새로이 강원을 개설하게 되었는데 화엄사의 진진응 대강백을 청하여 모시게 되었으므로 경보 스님도 스승인 진진응 강백을 따라 그곳에서 한 철을 보내게 되었고 이 위봉사에서 사미과(沙彌科)와 사집과(四集科)를 마치게 되었다.

 

위봉사는 본산 절에 비하여 볼 때 규모면에서 작기는 하였지만 지대가 높고 산천이 수려한 곳에 자리잡은 도량이었을 뿐만 아니라 절 아래에는 폭포수가 있어 여름철이면 관광객이 끓일 사이가 없을 정도로 절경이 빼어났다.

 

당시 그곳 위봉사의 주지스님은 유춘담(柳春潭)화상으로, 외부적으로는 위봉사에서 강원을 하는 것처럼 선전하고 실지로는 전주 송광사에 강원을 차렸다. 그 까닭은 위봉사는 지대가 너무 높고 또한 교통도 불편하였으므로 교통도 좋고 도량도 넓은 송광사에 강원을 열었던 것이다.

 

< 일붕이라는 법호를 받다 >

경보 스님은 먼저 온 그곳의 학승들과 인사를 나누고, 위봉사에서 첫날을 보내게 되었다.

스님네야 인연에 따라 운수처럼 다녀야 하는 것이지만 육지에서는 처음으로 기거하게 된 화엄사에서 높은 스님의 배움을 받으며 인연이 다하는 날까지 붙박고 있으려다가 위봉사에 온 탓인지 다른 스님들은 이미 여독에 깊이 잠이 들어있었건만 경보스님은 왠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혼자 살그머니 일어나 방 윗목에 놓인 호롱불을 켰다. 모두가 세상을 모르게 깊이 잠에 빠져 있었다. 경보스님이 화엄사에서 가져온 경전을 꺼내어 막 읽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천둥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칠흑같은 밤이 대낮처럼 밝았다.

 

그러더니 누구인가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다.

“ 경보야, 아직 공부하고 있고나”

처음 들어보는 힘찬 목소리였다.

“ 예 ” 하고 벌떨 일어나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왠일인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는 장자에 나오는 ‘붕새’이다. 내가 이제 나래를 펴면 저 태양이 가려진다”

 

경보스님이 「붕새」 라는 말에 놀라 기겁하고 보니 새벽녘의 꿈이었다.

“ 참 기이한 일이로구나. 붕새가 꿈에 나타나다니”

경보스님은 이미 중국 경서를 읽은바 있어 장자에 나오는 붕새에 대한 얘기를 알고 있었다.

 

붕새는 이 세상에 성인이 나타날 때 그 모습을 보인다는 새로 한번 나래를 펴면 태양을 가리고 오대양의 바닷물도 한모금에 마실 수 있다는 환상의 길조이다.

경보스님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구나라고 속으로 몆번이나 뇌까렸는지 모른다.

경보스님은 한갓 꿈이겠지 생각하고 열심히 배움에만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날, 위봉사 주지스님이 강백으로 모신 진진응 강백의 방에 들어가 무언가를 논의했다. 위봉사 주지스님은 진진응 강백에게 화엄사에서 강백을 따라온 경보스님을 제자로 삼고 싶다고 했고 진진응 강백도 쾌히 응하며,

“ 장차 좋은 목재가 될 것이요. 스님이 뒤를 잘 보살펴 주시오”라고 부탁했고, 위봉사 주지스님은 굳게 약속했다.

 

위봉사 주지 유춘담 화상은 강백 진진응 스님을 따라 온 젊은 서경보 스님을 보시고 장래에 희망이 있는 청년이라 생각하시고 경보스님을 법제자로 삼고 건당식을 하여 호를 일붕(一鵬)이라 지어주고 격려하고 고무하여 주셨다.

 

유춘담 화상은 젊은 경보스님이 스승에 대한 효심이 돈독하고 성질이 온순할 뿐만 아니라 재주가 있었고 유교의 한학에 밝아 능문능시(能文能詩)하여 글을 잘 짓고, 한시도 잘 지으며 글씨도 잘 쓰는 경보스님을 수제자로 생각했던 것이고, 그래서 제자를 삼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위봉사가 재정난으로 더 이상 강원을 운영할 수 없게 되자 춘담 화상은 제자인 일붕스님(일붕이라는 법호를 받으셨으므로 앞으로 일붕스님으로 호칭하기로 한다)을 불렀다.

“ 일붕, 거기 있느냐?”

일붕스님은 춘담 큰스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춘담 큰스님의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무릎을 끓었다.

“ 너도 알고 있듯이 우리 위봉사에서 더 이상 강원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구나. 재정이 허락지를 않아.... 네게 학비를 조달하여 줄터이니 서울로 올라가 동대문구 안암동 개운사 대원암 강원으로 가거라. 그곳에 박한영(朴漢永)강백이 계시니 앞으로 그분으로부터 학문을 익히도록 하여라 ”

 

뜻밖에 큰스님께서 서울에 올라가 공부하라는 말을 들은 일붕스님은 뭐라고 대답을 못했다.

이 때가 생각나시는 듯 일붕 큰스님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이시면서 이렇게 당시를 회상하셨다.

“뜻밖에 당하는 영광이어서 뭐라 대답할 말을 생각지 못하여 미쳐 대답을 못했었지요. 법호를 내려주신 은사님을 가까이에서 모시지 못하는 서운함도 있었고....,

이미 진진응 스승님을 통하여 익히 존경하던 박한영 스님의 가르침을 받게 되어 기쁘기도 하고..., 그래서 대답을 하지 못했지요.”

 

기술인이 그 당시 진진응 은사님이나 다른 스님들로부터 들었던 박한영 스님에 대한 명성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자 일붕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기억하시었다.

 

< 진진응 스님과 박한영 스님 >

“은사 진진응 스님께서는 언제나 말씀하시기를 ‘한영당이 나보다 한수 높다’라고 말씀하셨지요. 당시 개운사 대운암 강원은 한국불교의 고등강원으로 전국에서 학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다 그곳에 박한영 강백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게지요.

박한영 스님은 은사 진진응 스님과 도반 법우로 교분도 무척 두터웠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박한영 스님은 진진응 스님과 쌍벽을 이루는 스님으로 내전과 외전 합하여 2만권을 독파하신 박학이요,기억력이 발군의 천재셨다고 소문이 자자했었어요.

은사 진진응 스님께서는 다른 강원으로 가려거든 개운사 대원암 강원으로 가서 박한영 스님께 배우라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진진응 스님은 학문적으로 박한영 스님과 경쟁관계에 있으시면서도 그 분을 존경하셨어요. 참으로 훌륭한 스님이요 은사님이셨어요.”

 

일붕 서경보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당시 강백으로 쌍벽을 이루던 진진응 강백과 박한영 강백 두 고승으로부터 배움을 받았던 것은 행운이요, 자신만이 누렸던 축복이라고 하셨다.

SNS 기사보내기
SBC불교일보
저작권자 © SBC 서울불교방송 불교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