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업(業)의 법칙과 인간운명


업(業)은 산스크리트어로 까르마(Karma)라고 하며 행위(行爲)라는 뜻이다.

만들어진 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 행위의 특색이지만 행위는 사라져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행위는 뒤에 보이지 않는 힘을 남긴다. 사람을 죽일 때 죽인다는 행위는 죽이고 나면 사라져버리지만 그것으로 살인의 행위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 보이지 않는 힘이 곧 업(業)이다.

 

이 뜻의 <업>은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의 업은 인(因)과 같은 성질로서 선의 행위가 선의 결과를 남기고, 악의 행위가 악의 결과를 남기는 경우다. 선의 행위나 악의 행위도 최초로 한번이 하기 어렵지만 한번 성공하면 두 번째부터는 하기 쉽게 된다. 이것은 최초의 행위가 뒤에 습관성, 즉 업을 남긴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선은 선의 결과를 남기고 악은 악의 결과를 남기는 법칙이 되는 것이다.

 

또 한가지의 업의 법칙은 인(因)과 과(果)의 성질이 다른 경우의 법칙이다. 나쁜짓을 행하면 후에 양심의 가책이 있으며 후회가 있다. 특히 살인과 같이 심한 악을 행하면 그 행위의 두려움을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악인일지라도 악한 일을 하고 기분이 좋은 사람은 없다. 악의 뒤에는 고(苦)가 있으며 좋은일을 하면 기쁨이 있다. 이 관계가 법칙으로 성립된다.

 

<업>이란 것은 인간이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을 법칙으로 세운 것이다. 인간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제각기 사람의 운명이 달라져 있다. 태어나기 전의 <업>은 우리들에게는 알지 못하는 것으로 이것을 숙업(宿業)이라 부르고 있다.

 

어떻든, 불교에서는 인간의 운명은 <업>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창조신이나 주재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의 섭리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신도 업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개인의 운명이 제각기 다른 것을 본다. 여기에서 <업>의 인간의 법칙이 제각기 다른 것을 본다.여기에서 <업>의 인간이 법칙이 제기된다. <업>이라고 하면 인과응보라고 해석되어 숙명론(宿命論)인 것으로만 보는 것 같은데 숙명론은 아니다. 이것은 의사의 자유를 인정하는 입장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인생관, 운명의 문제를 보는 입장을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신이 개인이 운명을 지배한다는 견해, 둘째는 우연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견해, 셋째는 숙명적으로 영원한 과거로부터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견해다. 이 세가지가 다 극단적인 견해가 아닐수 없다. 여기에는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사의 자유가 인정되어 있지 않다.

 

물론 우리들이 무제한의 자유는 갖고 있지 않다. 출생을 결정할 수도 없고, 태어남을 선정할수도 없으며, 사회적 신체적인 여러 가지 제약을 받고 있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과 제약안에서는 의사의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자기의 미래를 자기의 결단에 의해서 선택하고 있다.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지 못할 때 노력할 가치도 희망도 없게 된다.

 

업(業)에는 과거를 필연으로서 받아들이는 입장과 미래에 자유를 개척해 나가는 입장의 두가지가 내포되어 있다. 나면서부터의 생활에 한정하지 않고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에의 긴 생존에서 생각하는 길이다. <업>을 인과응보의 숙명론이라고 보는 것은 업의 과거만을 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필연(必然)속에 자유를 인정하고 다시 자유의 결단과 그 결단에 책임을 지게 된다. 따라서 스스로가 행하여서 스스로 받는다는 것이 원칙이다.그러나 자기가 업의 응보를 받는다고 해도 이는 연기(緣起)의 세계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의 행위는 한사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도둑질 하는 사람에게도 이유가 있다. 그 사람을 훔치치 않으면 안될 그러한 사회적 상황이라는 것이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업의 인과는 개인적인 것인 동시에 사회적 역사적인 것이다.

 

연기의 세계에서 인과의 이법(理法)이 행하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개인적인 업의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업에는 사회전체로서 받는 업(共業)과 개인의 업(不世業)이 있다. 가령 자식이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어머니가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육체의 쾌락이나 고통운 불공업(不共業)이다.

 

그만큼 인간이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에서 탈각(脫却)하면 개인의 업은 그때에 소멸된다.

인과(因果)의 법칙을 해탈하는 길을 불교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개인의 업을 벗어버린 사람은 사회적 공업(共業)만의 세계에 살게 된다. 그때 사회의 괴로움을 자기의 괴로움으로 짊어지고 사는 입장, 즉 부처님의 대비(大悲)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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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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