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불교신앙의 목적과 대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신앙의 목적과 대의가 무엇이냐? 고 할 때 ,불교신앙의 목적이란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펴신 목적과 이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이 무엇인가?”

불교의 대의란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으뜸되는 사상이 무엇이냐?”하는 뜻이 되겠습니다.

 

불교신앙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부처님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은 수년,혹은 수십년씩 절에 다녀서 모두가 아무게 보살,아무게 거사님들이 되셨기 때문에 불교신앙의 목적과 대의가 무엇인지는 아실 것 아닙니까? 그것도 모른다면 지금까지 절에 다닌 보람이 무엇입니까?

 

자주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바른 불자가 되려면 단지 믿음만 가지고는 안됩니다.알아야 되는 거예요.‘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대부분 불교신앙의 목적과 대의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듯 합니다.기도하고 불공해서 복 받는 것,소원성취하는 것 여기에 목적을 두고 절에 다니는 분들이 많다고 보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기도하고 불공함으르써 복을 비는 일도 중요한 신앙의 일부분입니다.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 수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그보다는 불교신앙의 목적과 대의를 올바르게 알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불자라야 진정한 불자라 할 수 있습니다.

 

묘법연화경에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오신 목적을 부처님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고 하셨는데, 이를 요약해서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는 네 글자로 표한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 보임으로써,중생들로 하여금 이를 깨달아,부처의 경지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의 문을 모든 중생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중생들도 스스로 깨달아 부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처님의 일대사인연을 위주로 생각하면 불교의 목적은 ‘부처의 지견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지견을 깨달아 부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를 얻어서 부처가 될 수 있을것인가?

이 방법론이 불교의 대의가 되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 설정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없다면 이는 비 그친 후에 잠시잠깐 나타나는 무지개나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허망한 것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가르침이 부처님께서 일생동안 설하신 팔만사천법문입니다.그러므로 아함경, 방등경,반야경,법화경,열반경,화엄경 등의 모든 경전이 부처가 되려고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뗏목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불자들 가운데는 방법론인 경전에만 집착한 나머지 본래의 목적인 부처되는 일에 대해서는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처되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 경전인데 부처 될 생각은 포기하고 경전만 들여다 보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입니다.경전공부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본분을 망각하지 말고 경전을 통해서 부처님의 으뜸되는 가르침을 배우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마침내 성불이라는 목적을 달성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아함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뗏목으로 강을 건넌 후에 ‘이 뗏목 덕분에 나는 강을 건널수 있었다.나는 이제 뗏목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다니면서 쓰리라.’고 하면 그 사람은 과연 어디로 그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쓸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세존이시여. 그 사람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는데 그 뗏목을 다시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렇다.선한 법도 버려야 하겠거늘 하물며 나쁜 법에 집착해야 하겠느냐?”

<증일아함 신서림경>

 

이 말씀은 깨달음을 이룬 후에는 법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만 진정한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법문입니다.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도 마치 뗏목과 같은 수단이기 때문입니다.뗏목을 강을 건너는데 필요한 것이지 사람에게는 오히려 거치장스러운 물건일 뿐입니다.그러나 강을 다 건널 때 까지는 가장 소중하고 꼭 필요한 수단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강을 건너지 못하고 이편 언덕에 있는 중생들입니다.그러므로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는데는 뗏목이 필요하듯이 성불을 위해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뗏목과 같은 경전이 꼭 필요합니다.그러나 뗏목을 강 건너는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같은 논리로 경전을 아무리 많이 읽고,외우고,베껴 쓰고,해석을 잘 한다고 할지라도 부처가 되려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부처 되려고 절에 다닙니까? 제 생각에는 불행하게도 대부분 “아니올시다”라고 봅니다.그저 자식 잘되고 사업 잘되고 돈 많잉 벌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 절에 다니는 것 아닙니까?

 

모두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렇다고 봅니다.그러나 이런 소원은 불교신앙의 목적과는 하늘과 땅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소원은 일시적인 것,무상한 것,오히려 괴로움을 더 키우는 것이지만 불교신앙의 목적인 성불은 영원하고 항상하고 즐거운 것이므로 천지현격(天地懸隔)한 것입니다.

 

신도님들 뿐만 아니라 스님들 가운데도 성불이란 실현불가능한 일로 치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여기에는 그럴만한 원인이 있다고 보는데,그 원인은 ‘성불’이란 말을 너무 관념적이고 차원이 높은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처럼 여래.응공.정변지.무상사 등 십호를 갖춘 완전히 신비스러운 존재로서의 부처님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성불이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기고 이룰수 없는 희망사항 쯤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섯 저는 성불이란 말을 달리 표현하고자 합니다.성불을 ‘인격완성’이라고 하면 어떨가 합니다.그렇습니다.인격완성이 바로 성불입니다.여기서 인격완성이란 바로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갖출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는 것이 인격완성이요,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이 완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을 부처님이라고 하고,완전한 인격을 부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에는 크게 두가지 면이 있는데,하나는 지혜요,하나는 덕입니다.지혜는 세상을 바로 보는 안목이요,덕은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는 베품을 의미합니다.이 둘은 인격의 양면성으로 지혜로우나 덕을 갖추지 못했다거나 덕은 있는데 지혜롭지 못하거나 하면 이는 마치 한쪽 날개가 상한 새와 같고 한쪽 바퀴만의 자전거와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지혜와 덕을 완전히 갖춘 인격은 밖에서 구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의 본래부터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선천적으로 갖춘 지혜와 덕,즉 완전한 인격체로서 지덕을 겸비한 인간이 왜 이 모양,이 꼴로 살고 있는가?이런 의문을 갖게 되겠지요? 그 까닭은 본래 갖춘 인격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활용하지 못하는 까닭은 또 무엇인가? 그 원인은 무명에 있다고 합니다.‘무명’이란 밝음이 없음,즉 밝지 못하다는 뜻인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우리 자신 가운데는 무명이라는 것이 생겨서 완전한 인격체로서 타고난 지혜와 덕을 덮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면 이 무명이란 것은 무엇이냐? 다름아닌 탐진치 삼독심입니다.

 

그래서 이 무명, 즉 탐진치 삼독심을 제거하고 본래 자리로 돌아가 완전한 인격을 회복하자고 하는 것이 불교신앙의 목적인 <성불>입니다. 그러므로 성불은 없던 것을 새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본래 있던 것을 되찾자는 운동입니다.따라서 한번 해볼만한 일이 아닙니까? 남의 것을 힘으로 빼앗아야 된다거나 거치른 바다를 항해한 후에 얻게 되는 것이라거나 남보다 더 좋은 머리로 생각해 내야 하는 것이라면 불가능하다고 볼수 있지만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이라면 가능한 일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의 말씀 가운데는 도를 깨닫는 일이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보다도 더 쉽다는 말이 있고,도를 깨닫겠다고 온갖 노력을 하는 사람을 보고 ‘업은 아기 삼년 찾는 격’이라는 말도 있습니다.한편으로 이 완전한 인격은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갖춰져 있기 때문에 글을 잘 알아야만 한다거나 수행을 오래 해야만 하는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자신 가운데 지혜와 덕이 갖춰진 어엿한 부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자기자신이 본래부터 완전한 인격을 갖춘 완성된 인간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그러나 믿음과 자부심만으로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창고속에 금송아지가 있으면 무엇합니까?

그것을 찾아내어 써야 합니다.활용해야 합니다.그래야만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자기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덕 있는 사람이 되어 함께 사는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되는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기자신 가운데 무진장한 보배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이 보배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값진 보배입니다.왜냐하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집안에 보배창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집안에 있는 쓰레기통 속에 값진 패물을 버려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찾아내야겠지요?

 

쓰레기통은 우리 몸이고, 패물은 완전한 인격,곧 부처입니다.그러면 어떻게 찾을것인가?

그것을 찾는 방법이 바로 팔만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팔만사천 법문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별다른 것이 아니요,본래부터 갖춰져 있는 자신의 완전한 인격을 되찾는 방법론 즉 뗏목일 뿐입니다.

 

그러면 팔만사천법문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45년간 설법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없을까? 완전한 인격을 회복하는 방법을 한마디로 요약할수 있다면 이를 불교의 대의라고 정의해도 될텐데 그럴만한 말이 없을까?

 

물론 있지요.

옛날 중국 당나라에 조과 도림선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도과는 법명이고 호가 조과인데 ‘조과’는 새둥지라는 뜻입니다.왜 새둥지라는 호를 얻게 되었는가 하면, 그 스님은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마치 일산처럼 되어있는 낙락장송(落落長松)위에 자리를 잡고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호를 붙였던 것입니다.또 까치가 그 곁에 둥지를 틀고 살았으므로 작소화상(鵲巢和尙)이라고도 하였습니다.

 

하루는 시인 백낙천으로 더 알려진 백거이란 사람이 그 고을의 군수로 부임하여 그 산에 들렸든 길에 대사를 뵈오려고 찾아가 나무위에 앉아 있는 대사를 보고 말하기를, “선사께서 계신 곳이 몹시 위태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태수의 위험은 더욱 심하오”라고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백낙천은 그 뜻을 알수 없어서, “제자는 직위가 이 강산을 진압하고 있는데 무슨 위험이 있겠습니까?”하였습니다.그러자 선사는, “장작과 불이 서로 사귀는 것 같이 의식의 성품이 잠시도 머물지 않으니 위험치 않겠는가?” 이 말은 생각이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니 그것이 위험한 것 아닌가? 하는 뜻입니다.

 

백낙천이 또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스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뭇 선행을 받들어 행하라”

심오한 대답을 기대했던 백낙천은 그만 실망이 되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살짜리 아기도 그런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자 선사는 “ 세 살짜리도 말은 할 수 있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다.”하였습니다.그러자 백거이는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자! 여러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불교의 대의가 부엇인가? 하는 질문에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뭇 선행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백낙천처럼 그와 같은 말은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할 수 있다고 코웃음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조과스님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칠불통게(七佛通偈)라는 것입니다.과거 비바시부처님부터 석가모니부처님까지 한결같이 주장하신 가르침이란 뜻으로 칠불통게라고 합니다.

“제악막작(諸惡莫作).중선봉행(衆善奉行).자정기심(自淨欺心).시제불교(是諸佛敎)”라는 사구게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뭇 선행을 받들어 행해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것이 모든 부처님이 가르침이다”하는 뜻입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백낙천처럼 이 대답이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좀 어려운 대답을 구해 볼까요?

어떤 제자가 임제스님에게,“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하고 묻자 임제스님은 불자를 세워 일으켰습니다.그러자 제자가 악! 하고 할을 하자 임제스님은 그 제자를 불자로 때렸습니다.

(불자: 인도에서 모기나 파리를 쫒던 도구)

 

또다른 예화가 있습니다.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불법의 적적대의(的的大義)입니까?”하고 묻자, 황벽스님은 그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주장자로 임제스님을 때렸습니다. 그러기를 세차례나 반복했습니다.

 

앞에서 조과스님은 칠불통게를 통해 누구나 알아들을수 있는, 어찌보면 유치할 정도로 평범한 말씀을 하셨는데 같은 선사이면서도 임제나 황벽은 뭉둥이로 때리고 불자로 때리는 것으로 불교의 대의를 표현했던 것입니다.

 

뒤의 예화는 화두(話頭)로도 쓰이는 선법문이므로 설명을 하지 않고 여러분의 생각에 맡겨두지만 사족(蛇足)을 붙이면 황벽선사나 임제선사는 마음의 본체를 그대로 들어내서 그 작용을 보인 것이고,조과선사는 백낙천의 교만심을 꺾어 순수한 마음의 본자리로 돌아가게 하려고 그런 대답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읍시다.불교신앙의 목적은 분명합니다.성불입니다.부처님 되는 일,보편적인 용어로는 인격완성입니다.그러나 불교의 대의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로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기틀이 다르므로 한가지로 말할수 없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부처님께서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신 것입니다.황벽스님이나 임제스님처럼 대답할 수도 있겠고,구지선사처럼 손가락을 세워 보일수도 있겠고,혜가대사처럼 묵묵부답으로 정답을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칠불통게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그러므로 이 게송으로써 불교의 대의를 삼아도 될 것입니다.비록 누구나 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지만 이속에 온갖 부처님의 사상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천입니다.

이해하고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이 어렵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희론에만 매달리지 말고 지금부터 당장 제악막작.중선봉행을 행동지침으로 삼아 가정과 사회의 모범이 되고 자정기심의 마음으로 선한 일을 하고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본래부터 간직된 완전한 인격으로 복귀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과거 일곱부처님께서 한결같이 주장하셨고 미래의 미륵불이 이 땅에 오시는 용화세계에서도 여전히 변함없는 인격완성의 비법-그것은 “모든 악한 일은 하지 말고 뭇 선한 일을 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이 칠불통게를 생활신조로 삼고 이를 실천하여 인격완성을 이루고 이 땅에 불국정토를 구현합시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불교설법연구원편
법천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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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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