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현봉스님>

이번 겨울 안거는 가만히 벽을 향해 앉아 참선을 하든지, 경전을 펴들고 그 뜻을 살피든지, 염불을 하며 반조 하든지, 자기 부처인 자기 마음을 살피는 시간이다.

바깥의 정보와 소음에 신경 쓰거나 휘둘리지 말고 내면을 살피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가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그 흐름을 살펴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혼란하던 마음의 파도는 점점 사그라들고 고요히 맑아지면서 생각이 깨어나게 된다.

그러면서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게 되고 내면의 힘이 강해지며, 이전에 보던 것보다 세상을 더 밝게 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리고 바깥의 경계와 자신이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존재이며, 그 기준의 중심이 내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깨어있는 순간을 지속적으로 단련하며 정밀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 정진이다.

우리는 많은 정보와 변화하는 환경에 둘러싸여 거기에 넋을 빼앗겨 휩쓸리며 지내고 있다. 내 주변을 둘러있는 경계는 나의 초점에 따라 다르게 투영되는 것이니, 그것을 바라보는 초점의 주인공인 당체를 살펴 찾아야 할 것이다. 자기 마음을 찾는다는 것은 마치 자기 눈을 찾는 것과 같아서, 참으로 쉽고도 어려운 것이다.

내 눈이 어디에 있는가?

밖을 향해 찾아본들 이 세상 어디에도 자기 눈은 만나 볼 수가 없다.

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허둥지둥 헤매면서 신들에게 매달리고 하느님께 애원하고 부처님에게 통사정한들 누가 자기 눈을 찾아 줄 것인가?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 와서 찾아 줄 것인가?

아니면 보안(普眼)보살이나 조사가 와서 찾아 줄 것인가?

그것은 세상의 어느 누구도 찾아서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지금 이렇게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자기 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조국사의 수심결(修心訣)에 “만약 만나기나 얻어지기를 구하더라도 만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줄 알면 바로 견성(見性)이다.<若欲求會 便會不得 但知不會 是卽見性>”라고 하였다.

동산 양개(洞山 良介)스님이 위산(潙山)선사를 찾아가서 묻기를 “남양 혜충국사는 ‘무정(無情: 감정이 없는 물질)이 설법(說法)한다’고 하였는데, 저는 그 미묘한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하니, 위산이 답하기를 “나에게 있기는 한데 그 뜻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했다.

동산이 “스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하니, “부모가 낳아준 입으로는 끝내 그대에게 말해주지 못하겠다.” 하므로, “스님과 함께 도를 흠모했던 분이 계십니까?” 하니, “예릉(澧陵)에 있는 운암(雲巖)도인을 찾아가 만나보면 반드시 잘 가르쳐 줄 것이다.” 하였다.

동산이 운암을 찾아가서 물었다.

“무정설법(無情說法)은 어떤 사람이 듣습니까?”

“무정(無情)이 듣는다.”

“스님께서는 듣습니까?”

“내가 듣더라도 그대는 나의 설법을 듣지 못한다.”

“저는 어째서 듣지 못합니까?”

운암이 불자(拂子)를 세우면서 말했다.

“자, 들리는가?”

“들리지 않습니다.”

“나의 설법도 듣지 못하는데, 하물며 무정이 설하는 법이겠는가?”

“무정설법은 어떤 경전의 가르침에 있습니까?”

“어찌 보지를 못했는가? 아미타경에, ‘물과 새와 숲속의 나무들이 다 함께 염불하고 염법한다.’라고 했느니라.(豈不見 彌陀經云 水鳥樹林悉皆念佛念法)”

동산은 그 말에 깨닫는 것이 있어 다음 게송을 지었다.

也大奇 也大奇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기이하다.
無情說法不思議 무정의 설법은 생각으로 알 수 없네.
若將耳聽聲不現 귀로써 들으려면 소리조차 안 나더니
眼裏聞時方得知 눈으로 들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되리.

동산은 운암에게 “화상께서 백년 뒤에 갑자기 누가 묻기를 ‘스님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하니, 운암이 가만히 있다가 “다만 이것뿐이다<只這是>.” 하였다. 동산이 우두커니 생각하고 있으니, 운암이 “ 이 일은 알려면 아주 잘 살펴야 할 것이다.”하였다. 그래도 의심이 남았더니, 어느 날 개울을 건너다가 물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고 크게 깨달아 다음 게송을 지었다.

切忌從他覓 남을 따라 찾지 말라.
迢迢與我疎 나와 더욱 멀어진다.
我今獨自往 내가 이제 홀로 가니
處處得逢渠 어디서나 그를 보네.
渠今正是我 그는 지금 바로 나요
我今不是渠 나는 이제 그 아니니
應須恁麽會 이와 같이 알아야만
方得契如如 여여하게 맞으리라.

뒤에 동산은 운암의 진영(眞影)을 그려 모시고 공양을 올리었다.

그 때 누가 묻기를 “운암선사께서 ‘다만 이것이다<只這是>’ 하신 그 뜻이 무엇입니까?” 하니, 동산은 “내가 그때 선사의 뜻을 잘못 알았다.” 하였다. “운암은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未審雲巖還知有也無>” 하니, 동산이 “몰랐으면 어찌 그렇게 말했을 것이며, 알았으면 어찌 그런 말을 했겠는가?” 하였다.

도(道)는 알고 모르는 것에 속한 것이 아니다.

三更遊夢中 깊은 밤 삼경에 꿈 속을 헤매다가
忽聞自鳴鐘 홀연히 들리는 자명종 소리에
驚起開窓戶 깜짝 놀라 깨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孤月滿虛空 외로운 달빛만 허공에 가득하네.

외로운 달빛이 허공에 가득하듯이, 내 앞에 드러난 산하대지는 그대로 내 마음의 그림자인 것이다.

꿈같은 그림자에 흔들리지 말고 자기의 내면을 잘 살피는 동안거가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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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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