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적 서정의 경계 허물기,
중년의 심연 속에서 안과 밖의 일치” 

     

한국문학에 ‘국경 바깥’ 혹은 ‘접경 부근’이라는 디아스포라의 현장을 소환함으로써 남북분단, 경계 허물기, 국경 허물기 등을 주제로 한 정철훈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가만히 깨어나 혼자』가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독특한 대륙적 서정을 드러내 보이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동안의 시편들이 주로 국경 너머 이주민의 신산한 삶과 현실을 포착한 외적 디아스포라에 맞춰져 있었다면 이번 시집은 내적(혹은 내국(內國)) 디아스포라에 초점을 맞춘 서정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때, 내적 디아스포라라고 함은 외지나 타지에 대비되는 영토적 개념이 아니라 국경의 안쪽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자기 안의 심상, 혹은 누구나 단독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시대적 외로움의 심상을 지칭한다. 이번 시집은 그동안 러시아로, 중앙아시아로, 만주로 떠돌았던 25년의 작품활동을 뒤로 하고 이제는 ‘안으로’ 돌아와 안과 바깥의 심연을 ‘일치’시키고 있어 한층 의미를 더한다.

“너는 다섯 손가락을 가진 자아가 되어/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나는 더는 서러워하지 말라며/ 너를 호호 불어주었다”(「장갑」 부분)라거나 “오죽했으면 나 같은 것에게 붙어/그것도 발가락 사이에서 피워냈을까/너를 지우려고 병원에 갔을 때/자꾸 미안해 쳐다볼 수 없었다”(「사마귀」 부분)에 등장하는 ‘너’와 ‘나’는 바깥과 안쪽의 심상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렇게 보면 바깥과 안쪽에 대한 인식의 동시성이 이번 시집의 두드러진 변화이자 새로운 시적 갱신의 지점인 것이다.
“누구도 가족 아닌 인류는 없고/그건 나와 우리의 사망과 동시에/무한대의 사망을 예고하는 타전이었다”(「오늘의 타전」 부분)라거나 “나는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거기에 있다/시간을 옮겨 다닐 수 있다는 것/내 단어들은 여기서 만들어진다”(「두 개의 사월」 부분)에서도 동시성에 대한 인식은 각별하다.
그런데 동시성은 동시성에 머물지 않고 통시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나도 가끔 늑대처럼 울부짖는다/내부가, 내부의 위기가 비슷하다/쓰다 버린 것의 동질감이 그렇고/모든 건 버려진다는 보편성이 그렇다”(「옆집 부근」 부분)가 그것이다.

그 외에 「원주」, 「시간이 터져버렸다」, 「소식」, 「파」, 「냄비는 따끔하다」, 「두 번째 자연」 등의 시편에서도 통시성과 보편성의 획득은 두드러진다. 그런데 시인의 인식은 ‘눈에 보이는’ 동시성과 보편성에 머물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돌진해 들어간다. 
 
“냄새의 영광은 사람도 개도 아닌 하늘의 것/육신이 어떻게 해탈하는지 지켜보는 것은/땅의 영광이지//(…)//뼈가 정확히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몰라/나는 뼈가 스스로 말하기를 기다렸다”(「개가 물어가는 뼈에게 고함」 부분)에 이르면 땅에 묻혀 산화되어가는 뼈에게 말을 거는 ’파토스‘의 상태가 된다. 아니, 우리는 매일매일 로고스(이성), 파토스(감정), 에토스(본성)의 중첩으로 살아가고 있을진대 정철훈의 시는 이 세 요소가 자기 안에서 하나로 융합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밖에서 저벅거리는 발걸음과 바깥의 소란을 안에 들어와 듣고 있다.

안에서 듣는 바깥의 저벅거림, 바깥의 소란을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아니 문이라는 경계도 지워진 내 안의 풍경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물질과의 합일 상태에서 시인 자신마저 지워버리는 실종 상태에 대한 묘파는 압권이 아닐 수 없다.

“폭설 또 폭설/어디까지가 물질이고 정신인지/양극을 섞어버리는 혼돈/나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내가 없어졌다/폭설 속에서”(「폭설 속에서」 부분)

풍경은 바깥에 있고 상처는 안에 머문다지만 정철훈의 신작 시집은 안의 상처가 바깥의 풍경을 쓰다듬고 위로하는 새로운 시적 층위를 보여준다. 시적 화자가 (한국전쟁 때 땅에 묻힌) 뼈에게 말을 걸거나, 사과가 뼈에게 말을 붙이다가 “내 생각을 사과에게 어떻게 주입시키지?”라고 마침내 뼈의 생각을 듣는 침묵의 시간 혹은 멈춰 섬의 지점이 그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시집 제목을 “혼자 시를 짓다가 무너뜨리고/다시 시를 짓는 혼자”(「가만히 깨어나 혼자」 부분)의 상황으로 상정했던 것은 아닐까.

시집 말미에 해설이나 발문 대신 실린 「시인의 산문-다시 찾은 습작노트」는 시인이 고교 시절, 천재 작가 이상(李箱)에게 심취한 문청 시절을 회고하는 편지 풍이다. 시인이 근년에 ‘이상 사후의 가족비사’를 탐사한 ?오빠 이상, 누이 옥희?(2018)를 출간했음을 상기하면 그의 문학적 출발을 이상이라는 모더니스트에 심취한 1970년대 말에 이어붙이는 문학적 자전이자 독백으로 읽힌다. 이상의 아버지 김영창이 종이절단기에 세 손가락을 잃은 상실의 내면과 부친의 세 형이 한꺼번에 월북한 이래 가문의 몰락을 오래 지켜보았던 시인의 상실을 되짚는 대목은 흥미롭다.


저자 정철훈

1959년 광주 출생. 러시아 외무성 외교아카데미 역사학 박사과정 수료. 1997년 <창작과비평>에 「백야」 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살고 싶은 아침><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 <개 같은 신념>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빛나는 단도><만주만리> 장편소설 <인간의 악보><카인의 정원><소설 김알렉산드라><모든 복은 소년에게>< 평전·탐사기 ><오빠 이상 누이 옥희>

<백석을 찾아서><내가 만난 손창섭><문학아 밖에 나가서 다시 얼어오렴아><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뒤집어져야 문학이다><소련은 살아있다><옐찐과 21세기 러시아> 등이 있음


가만히 깨어나 혼자|저자 정철훈|도서출판b|값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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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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